잿빛의 구름에 덮힌 세상은 음침하다. 모든 것이 죽은 듯, 움직임이 없다. 바람 역시 불지 않는다. 아무도, 아무것도 적막을 깨려하지 않는다. 아니. 깰 수 없다. 그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다. 변화가 없는 공간에서의 순간은 영원이다. 그 영원을 깰 용기가 있는 것은 없다. 영원히 지속 된 것을. 될 것을 누가 감히 깰 수 있을까.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
순간
잿빛의 구름 속에서 이슬 한 방울이 떨어진다. 투명하다. 잿빛의 구름 속에서 나왔지만 티 없이 투명하다. 누가 저 투명하고 깨끗함이 잿빛 구름 속에서 나왔다고 믿을까. 한 방울의 이슬은 잿빛 연못 위에 한 점으로 떨어진다. 연못은 그것을 거부한다. 이슬은 연못 위로 조금 튕겨진다. 못이 이슬을 거부 했을 때, 그것은 이슬의 등장에 동요하기 시작한다. 시작은 한 점 이었다. 점은 점차 변화한다. 그리곤 그 주변이 점의 변화에 동요하기 시작한다.
동요는 커지기 시작한다. 한 점에서의 변화는 곧, 못 전체로 퍼진다. 튀어오른 이슬은 동요하는 못 위로 다시 떨어진다. 못은 몇 번 더 이슬을 거부하지만 이내 하나가 된다. 영원이었던 시간에 순간의 변화가 이슬 한 방울에 의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순간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사물은 영원 속에서 순간의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땅 속에서는 개구리가 올라와 울기 시작하고 물 속의 물고기는 수면을 어지럽히고, 힘주어 닫혀있던 잿빛의 꽃봉우리들은 하얗고 노랗고 빨갛게 피어나 잿빛 세상에 그들의 색상을 물들인다.
점점, 내리는 이슬은 많아져 이슬비가 된다. 변화하기 시작한, 움직이기 시작한 사물들은 이슬비에 몸을 맡기고 젖어든다. 그들은 알고있다. 이 비에 젖은 몸은 곧 마를 것이고 이슬은 자신들에게 스민 잿빛의 모든 것을 씻겨줄 것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그들은 이 이슬비에 마음껏 젖어든다.
이내, 비는 그치고 하늘은 쪽빛으로 물들어 하얀 뭉게구름만 떠간다.